2년 전, 캄보디아 씨엡립 여행에서 앙코르 와트를 보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유네스코가 지정한 아시아 불교 3대 성지가 있음을 알았다.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될 이스탄불 여행은 머나먼 계획이지만, 3대 성지 투어는 거리를 보나 비용을 따져보나 근 시일 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두 번째 유적지로 보로부두르를 찾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기대감을 가진 채, 여행 둘 째 날은 그렇게 시작됐다.


보로부두르 사원 여행

호텔에서 출발해 1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역시나 문제는 더운 날씨, 평소 잘 쓰지 않은 모자와 선크림까지 덕지덕지 발랐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해 늘 우산을 준비하고 있어 차라리 비가 조금이라도 왔음 했다.

하지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맑은 구름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보로부두르는 일출 때, 방문하고 싶었지만 자유여행이 아닌 걸 어쩌겠나.

2년 전 앙코르와트는 시간 제약이 많아 아쉬움이 많았지만, 보로부두르에서 충분한 자유시간을 갖는다 하니 믿어보자는 마음이었다.


보로부두르 사원 입장료

입장료와 정말 입고 싶지 않았던 치마

어른 입장료가 35만 루피아 (2만 7000원)

어린이, 학생 요금이 21만 루피아 (1만 6000원)

단체 입장료가 원화로 4만 원가량 수준,

우리나라 유적지에 비해 요금이 비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지은이 유홍준 교수가 우리나라는 유적지 관람에 대한 비용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고 지적했던 바가 생각 떠올랐다.

유적지에 대한 관람료가 터무니없이 낮다 보니, 유적지 보호에 대한 경각심도 없거니와 외적인 비용도 세금으로 충당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지적이었다.


새삼 유홍준 교수의 지적을 생각하니 보로부두르의 입장료와는 달리 터무니없이 낮은 우리 주변의 유적지 입장료는 어떠한가 생각하게 된다.

당장 서울 한복판에 있는 조선 5대 궁궐 입장료만 해도 보로부두르 입장료의 반의반 값도 안되지 않던가.


본론으로 돌아와, 문제는 복장 규정이었다.

전 날 밤 복장 규정에 맞춰 긴 바지를 준비해놨건만 날씨 핑계로 반 바지를 입고 온 것이 실책이었다.

사원 입장이 불가할 정도로 큰 잘못은 아니지만 규정은 엄연히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내 복장을 본 여직원이 보로부두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전통 치마를 둘러줬다.

다행인 건 일행 중 나만 이런 건 아니었다는 사실, 규정을 잘 지켜 여행지 문화를 지키는 코리안이 돼야겠다는 결심은 이 순간 쫑 났다.


보로부두르 사원 잡상인


사원 입구에 도착하면 물과 음료를 파는 상인들이 북적인다.

구입하는 건 개개인 마음에 달렸지만 굳이 그럴 필욘 없다.

매표소에서 무료로 생수병을 나눠주고, 느긋하게 차도 마실 수 있게 사진 오른쪽처럼 준비해 논다.

이런 친절함과 대접에 기분이 업 되지만, 땡볕에 사원을 둘러보면 이런 친절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원을 대충 둘러봐도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생수병 하나로는 목마름을 해결 하긴 부족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보로부두르 사원

197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아시아 유적으로썬 처음으로 유네스코 주도 하의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있었다.

매표소에서 티켓팅을 하는데, 표를 기념으로 갖고픈 마음에 직원에게 한 장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NO!

앙코르 와트에선 본인 얼굴 사진까지 찍은 입장료를 기념으로 가져갈 수 있었는데, 여행 흔적 하나라도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을 무너뜨린 직원이 참 야속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딘가.

더위에 기운을 차리고 매표소에 소 조금 걷다 보면 멀리 드러내는 천년 비밀의 위압감에 경탄을 자아낸다.


스투파

정상의 꼭대기 無의 세계에 우뚝 솟은 스투파가 인상적이다.

보로보두르의 의미는 인도네시아 어로 "언덕 위의 사원"

앙코르와트 보다 300년 정도 건축 시기가 앞섰고,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유적이 여러 군데로 나누어져 광범위함을 자랑하는 앙코르 와트에 비해 단일 불교 사원으론 세계 최대 규모로 세밀하고 웅장한 느낌을 선사한다.

자바 섬의 고대 불교 왕국 샤일 렌드라 왕국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연도는 780~83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샤일 렌드라 왕국이 멸망하면서 들어선 힌두왕국(마따람)이 지배하에 천년의 시간 동안 밀림 속에 자취를 감춰 전설이 되어갔다.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 불상

사원 곳곳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공간이 있다, 하지만 성한 불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열강의 식민지배를 겪으며 머리 없는 불상이 늘어났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불상의 머리를 떼어 태국 국왕에게 바쳤고, 

일본은 문화적 가치를 높게 산 나머지 불상을 통째로 고국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그로부터 천년 후 자바 섬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부총독 래플즈는 원주민들에게 전설 속으로 존재하던 보로부두르에 대한 발굴을 시작한다.

아시아 문화에 지대한 관심이 많았던 래플즈는 이 전설을 믿었기에 가능 한 일이었다.

전설이 말하는 언덕의 밀림을 헤맨 끝에 1814년 전설은 실화임을 확인했다.

여담으로 보로부두르와 비교되는 앙코르 와트는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인이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천년의 세월만큼이나 거목으로 뒤덮어 있었으며, 침식이 심각해 발굴에 어려움이 많았다.

설상가상 식민지배가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바뀌면서 발굴이 지체되는 듯했으나, 네덜란드는 정부가 나서, 1907년부터 4년간 복구공사를 진행했다.

1973년 아시아 유적으로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주도 하에 대규모의 보존, 보수 공사를 진행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복원 공사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왜 지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용도인지,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오늘날 인식되고 있는 사원? 왕의 묘, 왕조의 능, 승방 등 온갖 설이 난무한다.

보로부두르라는 이름조차도 명확한 건 아니다.



하층, 석가세존의 생애 (1)

사원은 15층 빌딩 높이에 높이 23m,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안산암 100만 개를 맞물려 쌓았으며 내부는 빈틈 없이 흙으로 채워져 있다.

오늘날, 일부 복원 구간에선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이 있으나 보존을 위한 노력으로 이해하자.

얼핏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사원은 크게 하층, 중층, 상층으로 구분된다.

아래부터 위로는 갈수록 좁아지며, 72개의 불탑과 상층에는 거대한 탑(스투파)가 존재한다.

벽화 곳곳에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는 과정이 나열돼있으며, 자바인의 삶 또한 표현돼있다.


보로부두르 단면도

사원의 단면도 겸 층 마다의 이해도

사원은 불교의 3계를 상징한다.

번뇌에 휩싸인 욕망의 세계인 욕계, 깨달음을 구하는 색계, 물질세계에서 해탈한 무색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반구형의 사원을 돌면서 상층에 도달하면 깨달음의 길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데, 어떤 용도로 건설했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기던 층부터 돌기 시작해 하층, 중층, 상층에 이르렀고 중간중간 현지 가이드 요셉 아저씨의 익살스러운 설명까지 더해져 사원 투어를 즐기고 있었다.


Borobudur

가이드 요셉 아저씨 말에 의하면 라마단 때문에 현지인들이 다른 날에 비해 없는 편이라 한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나온 현지인 관광객을 볼 수 있었다.

더운 날씨임에도 복장에서부터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보통 히잡은 흔하게 보는데 부르카는 보로부두르에 와서야 봤다.

유럽 일부 국가에선 공공장소를 비롯해 테러 위험과 여성차별로 인해 부르카와 니캅 착용을 못하도록 법제화 했다.

여성차별과 종교적 신념이라는 갈림길에서 과연 옷이 문제일까?라는 근본적인 생각을 한다.

결국 인간 본연의 문제다.

신념을 옷으로 규제한다 한들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받아들여 하는 사람의 인식도 변해야 할 덴데, 시대를 반대로 거슬러가는 원리주의로 가는 이슬람도 문제가 많다.

상념에 헤어 나올 즘, 주변 이슬람 사원에서 어김없이 울리는 코란 구절이 귓가에 맴돈다.

처음엔 독특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불교 사원에서 이슬람의 기도 시간을 맞이한다.

보로부두르는 종교와 종파를 가리지 않은 인도네시아의 사랑받는 유적지였다.


석가 세존의 생애 (2)

불전과 장식이 1,500면 이상 새겨져 있어 불교 예술의 거대한 아우라와 느낄 수 있으며 방대함에 지쳐, 일단 상층으로 올라가 보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나 역시, 자유 시간에 다시 한번 사원을 꼼꼼히 투어 하는데 방향을 잃기도 했다.

석가를 비롯해 보살, 왕족, 병사 등 벽면에 새겨져 있는 인물만 해도 1만 명이 이른다.

석가의 생애가 담겨 있는 초전법륜부터 마야부인이 흰 코끼리 꿈을 꾼 내용, 붓다가 출가를 결심하고 수행을 하는 내용, 하이라이트인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내용 가지 총 120개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원 전체가 불교의 총 백과사전인 셈이다.


borobudur temple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열린다.

그리고 상층의 맨 꼭층에 우뚝 솟은 행복의 불상 스투파가 보인다.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접하는 보로부두르의 이미지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이전의 아래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아우라에 놀라지 마시라.

기던 층에서, 하층, 중층을 모두 돌아 상층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비로소 불교에서 의미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정상의 눈앞에 광활한 숲이 펼쳐지고, 머라 필 화산이 보인다.

천년의 시간을 별 수난 없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연에 있다.


중층 72개의 스투파, 상층의 대 스투파

상층의 스투 파는 원형의 단을 이루며 72개가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다.

물론 위로 갈 수 록 스투파의 수는 적어진다.

특이점이 있다면 작은 창이 나 있어, 그 속에 안치된 등신불을 볼 수 있으며, 등신불도 창을 통해 세상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가장 위의 규모가 큰 스투 파는 불규칙한 마름모 창을 갖고 있으며 이는 속세의 번뇌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스투파에 난 창에 손을 뻗어 불상을 오른손 약지로 만지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로부두르 행운의 불상

상층에 위치한 72기 스투파 중 유일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지 않은 행운의 불상을 꼭 찾아보자.

같은 연대를 지닌 불교 사원 임에도 앙코르와트를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무래도 여행 전 공부를 하고 온 덕분에 구경 내내 염세적인 감정에 빠졌다.

기왕 보는 김에 3대 불교 성지의 마지막, 미안먀의 바 간까지 꼭 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한낮 더위를 감안하면 시간을 충분히 잡고 여유 있게 돌아보기를 추천한다.

휴일이나 주말엔 만명 이상이 몰린다 한다.

가장 좋은 방문시간은 일출이다. (자유여행으로 왔다면 꼭 추천)

그리고 유네스코에 비용을 가장 많이 지불하는 일본답게, 70년대 복구공사를 비롯해 오늘날까지 복원하는데 있어 일본 자본의 힘이 컸다 한다.

안내 게시판에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만 있다고 실망하지 마시라,

어쩌면 역사도 다 돈의 논리일지 모른다.


삼존불상

삼존불상이 있는 문뜻 사원을 지나~


빠원 사원

자와의 작은 보석이란 애칭이 있는 작고 아담했던 빠원 사원

보로부두르를 나와 인근의 문뜻 사원과 빠원 사원으로 사원 투어는 끝났다.

앞의 보로부두르에 비하면 작고 아담한 사원들이라 특별히 이야기할 게 없다.

덧붙이면, 음력 4월 15일은 인도네시아에서 석가 탄신일이다.

인도네시아어로 와이삭이라 불리며, 세계 각국의 불교 신자들이 모여 문뜻 사원을 시작으로 빠원 사원을 거쳐 보로부두르까지 걸어오는 순례 행사를 한다.


사향고양이 농장

빠원 사원 인근에 위치한 사향고양이 농장을 방문했다.

이 농장은 재배 위주보단 홍보의 느낌이 강했다.

본래 숲에서 사는 녀석들이라 활발할 줄 알았는데 강제로 잡아온 후 사육 기간이 길어서 그런가? 다들 생기가 없어 보였다.

고양이가 야행성임을 감안하면 낮에 하도 찾는 방문객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루왁 커피 생산 과정에 있어 사향 고향이 학대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 농장의 사향고양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하지 않았다.

동물 학대라 단정 지을 단서는 없으나 불안한 눈빛을 보아하니, 계속 있기가 불편했다.

일정에도 없이 여기로 온 이유도 역시나 농장에서 직접 만든 루왁 커피 판매를 위해서였다.

불편한 기분을 뒤로 한채 얼른 버스에 올랐다.


말리 오보로 거리

그만 좀 뿌리쳐라 이놈아! 말리 오보로 거리

하루 일정의 마지막으로 족자의 최대 번화가 말리 오보로 거리에 왔다.

쇼핑몰과 전통공예 바틱 상점이 늘어서 있는 거리다.

막상 구경 하다 보니 최대 번화가 치곤, 어제 우리가 들어간 대형 쇼핑몰만 못한데?

말만 최대 번화 가지 그냥 규모 큰 재래시장 같았다.

현지 상인에게 붙잡혀 도통 뿌리치지 못하는 일행과 최악의 도로 상황에 온통 젖어야 했던 신발 상태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보로부두르 하나면 오늘 하루는 완벽했다.


호텔에서 맥주 한잔 마시며 말리 오보론에서 불쾌했던 감정은 싹 잊었다.

나: "라마단인데 그래도 괜찮겠지?"

일행 "응, 우린 여행객이고, 알라도 안 믿는데 괜찮을 거야."


By 비룡과브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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