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떼기의 인생


어느덧 내나이 30대 중반

20대 후반에 인니와서 처음엔 행복했다.

비록, 일은 매일 11시간 12시간을 하고

토요일근무도 잦았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 비해 월급이 많았고

자카르타나 대도시만 나가도 한국인 버프로 대우 받는것이 좋았다.

마치 흡사 연예인이 된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나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시골 공장떼기 기숙사 생활... 틀딱들의 정치질에 심신이 지치고

언제까지 이 시골 기숙사 골방에서 살아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내년에는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더 중부자바 시골로 공장 이전이 계획되어 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더러 대기업, 공기업에 입사했고

중소기업이나 별볼일 없는 직업을 가진 애들도

자리를 잡고 나름대로 커리어가 쌓이면서...

더 이상, 예전의 나를 부러워 하던 친구들이 아니였다.

점점, 친했던 친구들의 단톡방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그저 겉돌기 시작했고

하나 둘씩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아, 이제는 친한 친구들의 결혼식조차 참석할 수 없다. 그냥...축의금 머신이다.

또 일년에 한 두번 휴가를 나가면, 친구들은 더 이상 나를 친구가 아닌

그저 해외에서 월급만 많이 받아 돈쓸곳이 없어 비싼 밥사주고 술사주는

그냥 조물주로만 취급했다... 내가 인니로 돌아가면

그들은 다시 귀신같이 나를 뒷전취급하기 일수였다.

내 나이 30대 중반 더 이상, 월급도 승진도 의미가 없다.

월급 많이 받는다고 내심 자부하던 나는

이제 월급으로는 살수 없는 부동산에 자괴감이 들었고

나보다 월급이 한참 낮던 친구들이 대출받아 산 집이 몇배로 오르는 것에

또 한번 회의감을 느낀다.

1금융 은행에서는 4대보험이 없어서 몇 억, 몇 천씩 대출도 안된단다. 집 매매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대기업, 공기업 맞벌이로 800, 1000씩 가구수입이 되는 친구들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이제는 가구수입이 나보다 작아도

공원에서 딸아이와 손잡고 가족사진을 찍는 친구 앞에서도

한없이 작아진다...

나는 오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야, 나 주말에 오늘 00년생 인니 여자랑 잤어 개쩔더라"

그 친구는 나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친구야...에휴... 너 언제 철들래?"


내 나이 30대 중반

이제 나를 응원해주고 믿어주는 분은

백발의 어머니, 아버지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대로 여기 계속 있으면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임종은 지킬 수 있을까...?


불효자인 나는 오늘도 외로움과 자괴감으로 굴링을 껴안고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