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특별한 나라, 인도네시아를 소개합니다
길바닥을 내 집 삼아 유라시아 대륙을 돌아다닌 지 어언 2+2=4 년.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나라가 가장 좋았느냐고 종종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 속에 꼭 들어가는 나라가 두 나라 있다. 바로 튀니지와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여러모로 나에게 특별한 나라이다. 필리핀에서 범죄에 휘말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다른 편에서 한 번 다루어 볼 계획이다). 그 후 비슷한 범죄 기사를 읽거나 듣기만 해도 심박수가 올라가고 식은땀이 났다. 어쩌다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 때면 뭔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고 몸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왠지 창피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키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남들에게 대체로 평온한 듯 보여졌다.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웃을 수 있냐며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고 후유 정신장애 즉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일수록 그 증상들이 심각해졌다. 괜찮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나를 치료해 준 건 경찰도 대사관 직원도 의사도 아니었다.
그 은인은 다름 아닌 바다였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한 도시에서 들렀던 바다. 처음엔 맨발로 탁 트인 바닷가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내 안에 쌓여 있던 찌꺼기들이 눈물과 같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때때로 천근만근 무겁던 몸이 폴짝폴짝 깨금발을 뛰고 싶어질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함박 웃음이 절로 났다. 내 눈이 웃고 내 코가 웃고 내 광대뼈가 웃고 내 입이 웃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너무 기분이 좋아져 혼자서 마냥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진짜...갠찮은 거 맞드래요?).
알 수 없는 바다의 힘이 내 상처 난 마음을 소독하고 덮어 주는 듯 했다. 새살이 돋아나게 했다.
이런 잊을 수 없는 경험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내게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이 곳이 나를 치료해 준 바로 그 바다. 자연의 힘은 내 생각보다 훠~얼씬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풰이붜륏, 인도네시아는 다양한 해발고도와 화산대가 빚은 아름다운 자연, 시시때때로 생산되는 신선한 제철 열대 과일, 해산물과 육류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요리, 지역마다 특색 있는 커피, 동남아에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그리고 손님을 환대하는 이슬람 전통(손님은 알라가 보낸 선물?!)을 따르는 친절한 사람들로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던 눔팡, 히치하이킹 역시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히치하이커의 열정, 어디로 갔어 이거?
우리나라에서는 가구로 유명한 보루네오 섬, 인도네시아에서는 칼리만탄으로 불리는 이 섬의 수도 폰티아낙에 머물 때였다. 값싸고 싱싱한 열대과일에 푹 빠져 살다 보니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겠더라. 사실은 그 보다 이 곳을 통과하는 에콰도르 즉 적도의 무더위 탓이었다. 절절 끓는 적도의 열기는 내 몸에 있는 수분과 더불어 의지나 열정 뭐 이런 것들도 시시각각 기화시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모든 걸 적도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었다. 다들 꼭 나 같지 만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구 한 복판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보며 내가 축축 처져 있던 동안에도 최소 두 명의 여행자는 이 곳에서 자신들만의 모험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폰티아낙에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친구 에릭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라며 두 명의 여행자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하루는 에릭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남미의 어느 나라에서 왔다는 여행자가 보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 친구는 며칠 전 폰티아낙을 출발해 오토바이로 칼리만탄 섬을 횡단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고 했다. 인적이 드문 사막지대를 건너는데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란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가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했다는 것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보니 머리에서는 피가 떡이 되어 있더란다. 물론 오토바이도 배낭도 소지품도 몽땅 사라진 뒤였다. 빈 몸으로 깨진 머리를 부여잡고 무작정 걷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제 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안정을 취하며 해맑게 웃는 사진을 에릭에게 막 보낸 참이었다. "나 운 댑따 좋아 히~"하면서. 띠용~
(어 잠깐잠깐, 이 친구 사진 보낸 폰은 어디서 난 거지? 다행히 안 뺏긴건가 아님 현지인에게 빌린 것인가?)
적도의 뜨거움을 만끽하며 칼리만탄 섬을 횡단한다면? 안 자고 안 먹고 24시간 주구장창 걷기만 해도 꼬박 13일이 걸린다. 1500킬로미터의 뜨거움!
두 번째는 여자 여행자 이야기였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20대의 이 여행자는 평균 25킬로 그람의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이었다(내 배낭은 보통 8킬로 그람. 10킬로 그람이 넘어가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액세서리를 넣어 다니며 그때 그때 이를 팔아 여행경비를 충당한다고 했다.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처자가 폰티아낙을 출발해 단순히 히치하이킹으로만 칼리만탄 섬을 횡단했다는 것이었다. 칼리만탄 섬은 심심할라치면 강도가 나타나 반갑게 인사하며 당신을 탈탈 털어 줄, 현지인에게도 악명높은 곳이었다. 섬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데 총 일주일이 소요되었다고 했다.
히치하이킹, 여기선 그거 안 통하는데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인도네시아는 아니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대부분이 히치하이킹을 하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장애 첫 번째는 현지인들이 '히치하이킹'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에 여행까지 왔으면서 버스를 탈 그까짓 돈 몇 푼이 없다고? 차라리 히치하이커들 손에 돈을 좀 쥐여주고 그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현지인들이 히치하이커들에게 통상 베푸는 최고의 친절이자 배려이다.
두 번째로는 히치하이커들의 신변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어허, 자기 발로 걸어와 내 차에 탔네? 이게 웬 떡이냐?' 자칫 운전자에게 소지품을 넘어 영혼까지 탈탈 털리기 십상이다.
세 번째로는 히치하이커들을 태운 운전자들이 마지막에는 적절한 보상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대개 도로 위를 달리는 그 무엇도 택시로 변신할 수 있다. 자동차든 트럭이든 오토바이든 자전거든 일단 누군가를 태우면 순간적으로 택시가 되는 것이다(택시, 멀리 있지 않아~요). 도로 가에 서 있는 이들이 모두 잠재 고객인데 히치하이커는 무슨 용가리 통뼈인가, 공짜로 태워주게. 종국엔 돈은 돈대로 나가고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상하기 십상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히치하이킹을 염두에 두지 조차 않았었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기어이 이 모험을 해 내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을 순 없다. 나도 그 대열에 얼른 합류해야지. 사실 그동안 버스나 비행기로 이동하는 게 지루해지기 시작한 터였다. 맨날 자기만 잔다. 재미가 없었다. 별 의미도 없었다. 가출한 본투비 히치하이커의 열정을 모아 모아서 세포 하나하나에 충전한다. 마음의 준비는 됐고 이제 적당한 때 길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소소한 히치하이킹 팁: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치하이킹이란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간혹 젊은이들은 영어단어 그대로 이해하겠지만 길 위에서 마주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현지에서 히치하이킹을 대체할 법한 단어로 'NUMPANG, 눔팡'이 있다. 단순히 '승차, 탈 것'이란 뜻으로 무임승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면 사전에 운전자에게 요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괜찮겠냐는 확답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가는 길에 마음이 편안하고 내릴 때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을 것이다.
드디어 적당한 때가 왔다. 족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 450킬로미터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단 하나, 주변에서 히치하이킹을 말리는 사람이 그나마 덜하다는 이유였다. 그간 히치하이킹의 히자라도 꺼낼라 치면 주변에서 난리가 났었다. 나는 듣기에도 황당하고 위험하고 바보 같은 시도를 하려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엄청난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이해한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90%는 무슬림이고, 내가 만나고 교류해 온 이들의 대부분은 독실하고 보수적인 무슬림 여성들이었다.
나의 히치하이킹 계획에 찬성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력하게 반대도 하지(않는 게 어디냐?) 않은 현지인 친구 레니가 족자카르타를 빠져나가는 길목 적당한 곳까지 나를 태워다 주었다. 그렇게 설레는 나의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히치하이킹, 눔팡이 시작되었다.
족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의 여정은 약 450킬로미터. 차로 꼬박 달려도 10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by 이가든
유라시아를 걷고 달리는 히치하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