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코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코 위도도는 물요노(Mulyono)란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이후 조코위(Jokowi)라는 이름으로 친숙하게 불리는 정치인이 되었고 2019년 현재 제7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다. 군이나 명문가 출신이 아닌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처음이고 2014년 7월 2차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수라카르타(솔로) 시장과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자카르타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수라카르타 시장 재직시절인 2009년부터 전국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PDI-P(투쟁민주당) 당원으로서 바수키 짜하야 뿌르나마(Basuki Tjahaja Purnama-아혹 Ahok으로 더 잘 알려짐)를 러닝메이트로 2012년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나가 재선을 노리던 전임시장 파우지 보워(Fauzi Bowo)를 꺾고 2012년 10월 취임하면서 자카르타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블루스칸(Blusukan)이라 부르는 불시현장점검을 자주 했고 주정부의 관료주의 개선, 업무과정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 축소를 주도했다. 그는 전임자들이 계속 미뤄오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국적 의료보험, 하천정비를 통한 홍수예방과 감소, 도시철도 건설착공 등 여러 프로그램들을 실행했다.


PDI-P는 인도네시아 정치권의 신성으로 떠오른 그를 2014년 대선후보로 지명했다. 그는 유효표의 과반을 얻어 2014년 7월 22일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고 대선 상대였던 쁘라보워 수비안토는 선거 결과에 불복해 개표가 끝나기도 전 대선레이스에서 이탈하면서 조코위를 강력히 비난했다. 조코위는 대통령이 된 후 그동안 중단되었거나 오래 지연되고 있던 고속도로, 고속전철, 공항과 기타 인프라 건설 등 인도네시아 열도를 연결하는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외교에 있어서 그의 정부는 인도네시아 주권 수호에 방점을 두고 불법조업 외국어선의 폭파격침, 마약밀수범들에 대한 최고형 선고 및 처형을 강행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호주나 프랑스 등 외세의 반발과 압박을 완강히 견뎌냈다. 임기 첫 해 말에 60% 후반에서 70% 초반 사이의 높은 지지율을 누렸고 현재 그는 2019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린다.


한 발짝 더 들어가 그의 인생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조코 위도도는 자바 출신으로 1961년 6월 21일 아버지 노토 미하르죠(Noto Mihardjo)와 어머니 수지아트미(Sudjiatmi) 사이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동생들의 이름은 이잇 스리얀티니(Iit Sriyantini), 이다야티(Ida Yati), 띠띡 렐라와티(Titik Relawati)다. 그의 아버지는 까랑안여르(Karanganyer) 출신이고 조부모는 보요랄리(Boyolali)의 작은 마을 출신이다. 어릴 적 병을 앓았던 그는 자바의 전통에 따라 태어날 때의 이름인 물요노에서 조코 위도도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위도도란 자바어로 ‘건강하다’는 뜻이다. 12살 때 그는 아버지의 가구제작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릴 적 그의 가족들이 세 번씩이나 집에서 퇴거당한 경험은 훗날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쳐 수라카르타 시장시절 도시의 주택공급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티르토요소(Tirtoyoso) 111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알려진 곳이다. 그는 수라카르타 공립 1번 중학교로 진학했다. 계속 공립 1번 고등학교로 진학하려 했으나 입학시험에 떨어져 수라카르타 공립 6번 고등학교에 대신 진학했다. 어린 시절 아주 뛰어난 공부실력을 가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코위는 이후 족자 가자마다 대학의 산림학과를 1985년 졸업했다. 거기서 그는 합판의 용도와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후 그는 아쩨 주정부 소유인 꺼르따스 크라프트 아쩨(PT. Kertas Kraft Aceh)라는 회사에 입사해 지금의 브너르 머리아 군(Kabupaten Bener Meriah)에서 1986-1988 기간동안 수마트라 소나무의 조림지와 원자재 감독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곧 회사 일에 흥미를 잃은 조코위는 고향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가구공장에서 1년간 일한 후 자기 회사를 설립하고 장남의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라까부(Rakabu)라고 지었다. 주로 티크 가구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한때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다가 PGN(인도네시아 가스공사)으로부터 5억 루피아의 대출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1991년 수출을 시작한 그의 가구는 해외에서 호평을 받아 프랑스에서 먼저 팔리기 시작했는데 버나드란 프랑스 바이어가 지금은 누구나 알게 된 ‘조코위’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여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수많은 조코(Joko)라는 이름의 남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차별성을 띄기 시작했다.


조코위

(사진: 현역 육군 중장시절의 루훗 빈사르 빤자이탄 장군)


2002년 조코위는 수라카르타의 가구제작자협회 회장까지 올랐다가 정치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가구를 팔러 유럽을 다니면서 그곳 도시들에 깊은 감명을 받아 고향을 유럽처럼 발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수라카르타(솔로) 시장이 된 후 정치인이자 예비역 육군대장 루훗 빈사르 반자이딴(Luhut Binsar Pandjaitan)과 동업회사를 세웠다. 두 사람이 세운 이 회사는 조코위의 라까부와 루훗의 토바 스자흐떠라(PT. Toba Sejahtera)를 합친 것으로 라까부 스자흐떠라(PT. Rakabu Sejahtera)라고 이름붙였다. 조코위 대통령 후반기 내각의 실력자 루훗 빤자이탄과의 교류는 이렇게 매우 오래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코위는 2018년 502억 5천만 루피아(약 350만불)의 재산신고를 했는데 그 대부분은 자바와 자카르타에 가지고 있는 부동산들이다.

그는 2004년 PDI-P에 입당해 F.X. 하디 루디앗트모(F.X. Hadi Rudyatmo)를 러닝메이트로 하여 2005년 수라카르타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PDI-P와 국민각성당(PAN)이 그를 지지했다. 그들은 당시 현직시장 슬라멧 수리얀토(Slamet Suryanto)와 다른 두 후보들을 제치고 36.63%를 득표하며 선거에 이겼다.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상대 후보진영에서는 그가 부동산과 가구사업을 했다는 사실을 줄곧 문제 삼았다. (뭐가 문제라는 것일까?) 그러나 한 신문은 그가 사람들과 소통하며 쉽게 신뢰를 얻는 리더십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성공적으로 시장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사업차 자주 여행했던 유럽 도시들은 수라카르타 변혁으로 가는 벤치마크가 되었다.


수라카르타 시장 조코위

(사진: 수라카르타 시장 시절 조코위 – 부시장 하디 루디앗트모와 함께)


조코위 시장은 새로운 전통시장들의 건설, 기존 시장들의 개보수, 수라카르타 중앙통에 3미터 폭 거리 7킬로미터에 이르는 보도 건설, 발레깜방(Balekambang), 스리웨다리(Sriwedari) 등의 공원 재정비, 시내도로 가로수 벌목행위에 대한 벌칙스티커 제도 도입, “자바의 혼” (the Spirit of Java)이라는 슬로건 하에 도시를 자바문화와 관광의 중심으로 리브랜딩, 회합과 인센티브, 컨벤션, 전람회(MICE) 장소로서의 도시 마케팅, 주민 전체에 대한 건강교육보험 실시, 바틱 솔로 트랜스(Batik Solo Trans)라 명명한 고속버스 운송시스템, 에셈카(Esemka) 인도네시아 자동차 생산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솔로 테크노파크 설치 등의 정책들을 펼쳤다. 그는 블루스칸(blusukan)이라는 것을 솔로 시장 재직시절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불시에 예정에 없던 방문을 통해 사람들의 의견과 문제점들을 듣는 일이었다. 고압적인 인도네시아 정치인들이 거의 하지 않던 이 방식이 그의 정치경력에 큰 인기를 더했다. 그는 가족들이 수라카르타시가 하는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친인척 부정부패를 미연에 예방했다.

그의 지도력과 ‘솔로, 자바의 혼’이라는 모토를 중심으로 도시 브랜딩을 통해 수라카르타는 빠르고도 긍정정인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 그가 재직 중 반자르사리 공원의 오래된 상점들을 충돌없이 성공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 개방된 녹지의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그는 기업들이 지역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는 지역 TV 방송에 자주 출연해 지역사회와의 긴밀하게 소통하려 노력했다. 도시 브랜딩사업의 일환으로 수라카르타를 세계유산도시 연합(Organization of World Heritage Cities)의 회원도시로 신청해 2006년 가입승인을 받았고 곧이어 2008년 10월 동 연합의 컨퍼런스를 수라카르타에 유치했다. 2007년 수라카르타는 월드 뮤직페스티벌을 도심 가까이 포트 바스텐부르크 컴플렉스(Fort Vestenburg complex)에 유치했다. 이 페스티벌은 2008년엔 망꾸느가란 궁전 컴플렉스에서도 열렸다.


조코위 시장

(사진: 전기세를 잔돈으로 지불하는 조코위 수라카르타 시장)


조코위의 개인적 성향은 물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포퓰리스트적 요소가 광범위한 유권자들과 굳건한 유대관계를 만들었다. 2011년 수라카르타가 국영전력공사 PLN에 89억 루피아(약 1백만불)에 달하는 청구서 결재 기한을 넘겨 황당한 방법으로 결재독촉을 받은 바 있었다. 전력공사가 엄격하게 전기세를 받아낼 요량으로 크리스마스 직전 수라카르타의 가로등을 다 꺼버렸던 것이다. 수라카르타 시는 서둘러 해당 비용을 결재하면서 전력공사가 그런 행동을 취하기 전에 민중의 권익을 먼저 고려해야 했다고 반발했다. 이러한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조코위는 수백 개의 지폐 다발과 동전들로 이루어진 89억 루피아 현금을 들고 전력공사 지역사무실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벌여 전국의 이목을 끌었다.

2010년 그는 또 다시 하디 루디앗트모와 함께 선거에 나가 90.09%를 득표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오직 한 개의 투표소에서만 졌을 뿐이다. 그는 2008년에 템포지의 ‘템포가 선정한 지도자’로 선정되었고 리퍼블리카 신문으로부터는 2010년 “개혁가상”을 수상했다. PDI-P가 그를 지명하기 훨씬 전인 2011년부터 그의 이름은 인도네시아 국립대학(UI)와 사이러스 네트워크(Cyrus Network)에 의해 차기 자카르타 주지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불루스칸

(사진: 시장에서 불루스칸을 행하는 조코위 대통령)


조코위는 2차 투표까지 간 2012년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서 현직 파우지 보워 지사를 꺾고 승리했다. 자카르타에서 그에게 자문을 아끼지 않은 측근들 중에는 수라카르타 시장 시절 동료였던 FX 하디 루디아트모, 수마르토노 하디노토(Sumartono Hadinoto), 앙깃 누그로호(Anggit Nugroho), 그리고 자카르타 부지사 러닝메이트로 함께 뛴 아혹 등이 있었다. 그는 수라카르타 시장 시절부터 해왔던 블루스칸 즉석방문을 계속했는데 주로 슬럼지역 등 인구 밀집지역을 다녔다. 이러한 즉석방문에서 그는 수수하고 단촐한 옷을 입고 시장을 들르거나 좁은 인도를 걸으며 음식가격, 주택문제, 홍수, 교통 등 현지 주민들의 관심사인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보고 들으려 했다. 지지율 조사결과와 매체들의 보도는 조코위가 직접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이 자카르타는 물론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음을 시사했다.

취임 전까지만 해도 연간 41조 루피아에 불과하던 자카르타 지방세수를 그는 취임 후 첫 해인 2012년에 72조 루피아로 끌어올렸다. 조코위와 아혹은 자신들의 월급 내역과 자카르타 지방 예산을 모두 공개했다. 그들은 온라인 세무, e-예산, e-구매, 현금관리시스템 등 투명성을 높이는 프로그램들을 내놓았다. 또한 조코위와 아혹이 참석하는 모든 회합과 활동들은 녹화되여 유튜브에 공개되었다.


자카르타 건강카드 KJS

(사진: 자카르타 건강카드 KJS)


건강보험에서 조코위는 보편적 의료보험프로그램인 자카르타 건강카드(Kartu Jakarta Sehat - KJS)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국영 아스케스 인도네시아(PT. Askes Indonesia (Persero))를 통해 공급되는 보험과 건강보험을 2만여 가지의 의료 서비스와 의료절차에 적용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현장에 세부적으로 적용되기까지 많은 혼선이 있었고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조코위는 인내심을 가져달라 요청하며 이 프로그램을 강행했다. 이 제도는 이미 자카르타의 의료복지를 크게 향상시키는 것이지만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기존의 잠소스텍(Jamsostek)을 대체하고 내놓은 BPJS 건강/노동보험은 KJS 시스템을 크게 업그레이드한 작품이다. 비록 미비한 부분이 있으나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복지가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고 실제로 큰 병을 거의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물론 이는 인도네시아 의사들의 실력향상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카르타 스마트 카드 KJP

(사진: 자카르타 스마트카드 KJP)


교육분야에서 조코위는 2012년 12월 1일 가난한 학생들을 돕기 위한 자카르타 스마트카드(KJP)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자카르타 정부가 교과서 및 교복 구매에 필요한 교육목적 비용을 보조해 학생들이 해당 스마트카드로 ATM에서 인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그의 자카르타 주정부는 렐랑자바딴(lelang jabatan)이라는 공직채용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는 주정부 산하 모든 공직자들에게 특정 요건을 중족시키면 일정 직급에 도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준다는 취지의 제도였다. 그는 빠사르밍구와 따나아방 행상들의 무질서한 군집 상행위에 대한 규제를 마련했고 홍수피해 감소를 위해 하천 준설과 집수장 정비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장기간 연기되고 있던 자카르타 MRT(대량운송철도시스템-지하철)과 LRT(경전철)도 착공했다.

PDI-P 당의 메가와티 수카르노뿌뜨리는 조코 위도도를 2014년 대선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해 7월 9일 결선투표 직후 출구조사와 각종 집계에서 조코위의 승리가 확실시되었지만 상대편인 쁘라보워 수비안토도 자신의 승리를 주장해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투표 당일 개표집계가 끝나는 한국과 달리 개표만 며칠씩 걸리는 인도네시아에서 7월 22일 마침내 개표결과가 발표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쁘라보워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고 주장하며 판을 깨고 대선에서 이탈했다. 조코위는 전체 유효표 중 53.15%인 약 7,100만표를 획득하여 46.85%로 6,258만표를 획득한 쁘라보워를 누르고 대통령 당선자로 공식 발표되었다. 하지만 쁘라보워는 불복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조코위는 승리가 확정된 후,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신질서정권 아래 크면서 자신과 같이 서민층 출신이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기대해보지 못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미국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거긴 아메리칸 드림이 있죠? 우리에겐 인도네시안 드림이 있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조코위는 군인출신도 아니고 정치 엘리트집안 출신도 아닌 첫 번째 서민 대통령(솔직히 서민이라 불리기엔 재산이 너무 많은 게 사실)으로 “우리 이웃으로서 정계에 뛰어들어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고 평가가 뒤따랐다. 조코위는 2014년 10월 20일 공식적으로 제7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취임했다.


2018년 조코위는 2019년 재선을 나설 것을 밝혔고 그해 8월 9일 마룹 아민(Ma’ruf Amin)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발표했다. 그동안 강력한 러닝메이트로 거론되었던 전 국방장관이자 헌법재판소장 마흐푸드 MD(Mahfud MD)는 조코위의 다른 연정 파트너 정당들에게 밀려 영향력 큰 무슬림 인물인 마루프에게 기회를 뻇겼다. 조코위는 마루프를 러닝메이트로 발표하면서 정부와 종교계 양쪽에서 쌓은 그의 풍부한 경험을 높이 샀다고 밝혔다.


마흐푸드 MD, 마루프 아민

2019년 1월 조코위가 이슬람 급진주의자 아부바까르 바시르(Abu Bakar Ba"asyir )를 고령과 건강악화 이유로 석방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이는 선거를 앞두고 조코위가 보수 무슬림 세력의 마음을 사기 위한 행보라는 비난일 일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시르가 그의 석방 조건 중 하나였던 빤짜실라 이념수용 선서를 거절함에 따라 이 계획은 2019년 1월 23일 취소되었다. 바시르는 2002년 대부분 외국인인 202명의 목숨을 앗아간 발리폭탄테러의 배후로 알려진 알카에다 계열 제마 이슬라미야(JI)의 지도자다. 테러범 배후 무슬림 지도자를 사면해서 무슬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 매카니즘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조코위는 임기 첫 해 여소야대 정국에서 애를 먹다가 두 번째 다수 정당인 골카르가 반대에서 지지로 선회하면서 상황이 호전되었다. 조코위는 골카르 당내사안에 간섭했다는 비난을 부인했으나 루훗 빤자이탄은 그 가능성은 일부 인정했다. 그의 내각 산업부 장관 아이르랑가 하르따르토(Airlangga Hartarto)가 2018년 골카르당 총재로 선출된 것이 그런 의혹을 부추겼다. 국민각성당(PAN)은 그전에 우호세력으로 돌아섰다가 2018년 다시 반대진영으로 선회했다. 수하르토에게 저항하며 국민적 지지를 받던 아미엔 라이스가 세운 이 정당은 최근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듯 하다.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띠 재무장관

(사진: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띠 재무장관)


조코위는 2014년 10월 26일 그의 첫 내각 34명의 각료들을 선임했다. 그의 내각은 첫 여성 외무장관이 된 렛노 마르수디(Retno Marsudi) 등 여성을 많이 포함하여 환영받았지만 메가와티의 딸 뿌안 마하라니(Puan Maharani) 같은 인사가 포함된 것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조코위 행정부에는 이전 부서들이 통합, 재편, 개명의 과정을 거쳐 두 개의 새로운 장관직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공공사업/주택부와 환경/산림부였다. 그는 2018년까지 세 번의 개각을 단행하여 리잘 람리(Rizal Ramli), 밤방 브로조네고로(Bambang Brodjonegoro) 같은 이들을 낙마시키고 그 대신 루훗 빤자이딴, 전 세계은행총재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띠(Sri Mulyani Indrawati) 등을 새로 영입했다.

조코위는 자기 당 인사들로부터 수모를 당하기도 했는데 자당 국회의원 에펜디 심볼론(Effendi Simbolon)은 그의 탄핵을 주장했고 2015년 4월 9일 PDI-P 당대회에서 메가와티 수카르노뿌뜨리는 조코위를 마치 자신의 수하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녀는 대선 메카니즘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당이 추대하는 만큼 조코위가 대통령이 된 것은 당이 그를 추대해 주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당연히 대통령도 당 정치노선을 따라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보다 몇 개월 전 조코위와 메가와티는 신임 경찰총장 선임을 두고 충돌했는데 메가와티는 자신의 전 비서관 부디 구나완(Budi Gunawan)을 지지한 반면 조코위는 바드로딘 하이티(Badridin Haiti)를 지지했다. 메가와티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코위가 눈에 거슬렸으리라. 정치 엘리트 가문 인사들이 조코위를 보는 시각은 예전 한국 고위 정관계 인사들이 고졸 노무현을 보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조코위 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당시 현직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보조금 철폐에 따른 유류비 추가인상을 책임지고 결정할 것을 촉구했지만 유도요노는 이를 후임자에게 짐지웠다. 실제로 정부가 유류인상을 도모할 때마다 사회혼란이 찾아왔던 과거가 있었다. 2015년 1월 1일 결국 조코위 대통령이 유류 보조금 축소 방안을 내놓자 예상대로 반대 데모가 촉발되었는데 조코위는 사회간접자본과 교육, 건강분야를 위한 자금조성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임을 역설했다. 한편 2015년 3월부터 프레미엄 브랜드의 휘발유 가격을 시장가격보다 훨씬 밑도는 선에서 결정하면서 이에 대한 보조금을 정부예산에서 직접 부담하지 않고 국영 석유회사인 뻐르따미나가 떠안도록 했다. 거기에다가 정부는 전국적인 석유제품 단일가격 프로그램을 정착시켜 깔리만탄과 파푸아 오지까지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특정 기름이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도록 했고 2017년에 해당 목표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2015년 1/4분기에 연간 GDP 성장율이 4.92%로 발표되었고 2/4분기에는 4.6%를 기록하면서 2009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그 이후 GDP 성장율은 5% 이상을 늘 기록했지만 건강한 GDP 성장율이라 여겨지는 6% 선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편 달러 대비 루피아 화폐가치는 조코위 취임 이래 줄곧 하락세를 보여 2018년에는 달러당 15,000 루피아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환율이었다. 연간 물가인상율은 2015년 6월 7.26%로 5월이 7.15%를 넘어섰고 2014년 같은 6월 물가상승율 6.7%보다도 높았다. 조코위 정부는 전임자의 자원민족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프리포트 맥모란, 토털, SA 및 쉐브론 같은 다국적기업들이 쥐고 있던 자산들 일부에 대한 국유화를 시도했다. 또한 수입을 줄일 목적으로 정부는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석유채굴기업들에게 원유를 국영 뻐르따미나에게 판매할 것을 명령했다.

사회간접자본 개발은 조코위 정부의 중점정책으로 도로 및 철도확장, 항만 및 공항개발, 관개수로 건설 등에 중점을 두었다. 2016년 정부예산 중 290조 루피아(약 220억불)가 사회간접자본확충에 배정되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대액수였다. 그는 전체적으로 265개의 사회간접자본 프로젝트를 2016년부터 시작했다. 2015년 9월 인도네시아는 55억불 규모의 고속철도 프로젝트를 중국에게 주면서 이를 위해 장기간 경쟁했던 일본에게 물을 먹였다. 인도네시아 교통부는 이들 프로젝트 계획에서 일련의 결점들을 노출하며 실현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던졌고 조코위가 대형 프로젝트들을 현실화시키는 데에 능력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를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가운데 조코위는 해외투자유치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다른 주요 프로젝트들로서는 총연장 4,325킬로미터 파푸아 횡단도로(트랜스 파푸아 로드)와 트랜스 자바 고속도로의 완공, 트랜스 술라웨스 철도와 트랜스 수마트라 고속도로의 착공, 24개의 전략항구를 포함하는 500억불 규모의 주요 해양부문개발사업, 격오지 공항 확장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해양 고속도로 프로그램’이라 명명된 항만개발 및 현대화 프로그램은 비교적 잘 개발된 서부지역과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은 동부지역 간의 물가불균형 완화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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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프로젝트들 외에도 조코위 정권은 전국적으로 마을기금 프로그램을 정착시켰다. 이는 전국 각 마을들이 도로, 상수도, 관광개발 같은 기본 인프라와 농촌경제 개선을 위한 마을수익사업 등에 정부기금을 할당, 배정하는 것이다.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 187조 루피아(약 140억불)가 이 프로그램에 소요되었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토지증서 발급 완결을 목표로 해당업무의 효율성 재고와 합리화를 목표로 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연간 50만 건 정도에 머물던 토지증서 발급건수를 연간 수백만 건으로 끌어올렸다. 2016년 정부는 관련법을 강화하기에 앞서 부유층이 미신고자산을 자진신고할 마지막 기회를 주는 조세사면법안(Tax Amnesty Bill)에 서명했다. 이를 위해 지난한 협상과 진퇴공방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이는 그간 비슷한 조치들에 비해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데 미신고자산 4,865조 루피아(약 3,660억불)가 이 기간 중 세무서 신고를 마쳤다. (사진: 조세사면제도 시행 홍보물) 한편 인프라를 위한 대규모 지출은 결과적으로 국가 채무를 48% 늘려 2014년부터 2018년 3월까지의 기간 중 채무가 1,810억불로 늘어나 야당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조코위 집권기간동안 재판정에서 언도된 사형선고에 대한 집행이 강행되었다. 조코위는 사형집행을 앞둔 마약사범들에게 어떤 관용도 배풀지 않겠다고 천명했고 자카르타글로브(Jakarta Globe)의 보도가 오류투성이라 말하며 인도네시아는 마약관련 범죄에 관한 한 비상사태라고 밝혔다. 그러한 입장은 관련 외국인 범죄자의 출신국들과 외교관계 악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해외에서 사형집행을 앞둔 인도네시아 국민들 운명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인도네시아 호주 마약범

(사진: 마약혐의로 사형당한 호주인 뮤란 수쿠마란과 앤드류 챈)


2015년 사형집행이 여러번 진행된 후 호주, 브라질, 네덜란드는 자기 대사들을 귀국시켰다. 호주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해외원조를 반으로 줄였고 국제사면위원회는 인도네시아가 인권보호를 위한 적절한 절차를 무시했다며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전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장 짐리 아스히디키(Jimly Asshiddiqie)는 자카르타에서 사형제도 폐지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로 조코위가 구명청원을 거절할 당시 관련 서류를 가지고 있거나 읽지 않았다는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보도에 대해 호주인 뮤랸 수쿠마란(Myuran Sukumaran)과 앤드류 챈(Andrew Chan)에 대한 사형집행명령이 조코위 개인의 결단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같은 해 조코위는 프랑스인 세르지 아틀라위(Sege Atlaoui)와 필리핀인 메리제인 벨로소(Mary Jane Veloso)에 대해 아직 법률청원이 진행중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을 연기했다. 2017년 당시 인도네시에는 260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대기 중이었다.

2016년 초 조코위 정부는 2003년에 재정된 이전 반테러법을 대신할 새로운 반테러법을 상정했다. 2002년 발리 폭탄테러 이후 최악의 테러공격이었던 2018년 수바라야 폭탄테러가 벌어지자 당초 논쟁이 끊이지 않던 해당 법안이 마침내 통과되어 대통령의 재가와 경찰의 요구가 있을 경우 군대가 반테러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안은 테러용의자의 구금기간 연장을 용이하게 하고 법원의 허가 없이도 도청을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조코위는 만약 그해 6월까지도 이 법안이 통과하지 않으면 대통령령으로라도 강행하겠다고 국회를 압박했다. 그는 2017년 논란이 되었던 대중조직에 대한 법안을 지지했는데 그 결과 이 법안이 통과하자 히즈붓 타흐리르(Hizb ut-Tahrir)의 인도네시아 지부가 즉각 해체되었다. 그는 빤짜실라 국가이념을 수호하기 위해 이 법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1965년 9.30사태 이후 벌어진 인권유린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주도 심포지움이 2016년 열렸지만 조코위는 이와 관련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성적소수자(LGBT) 권익에 대해 조코위는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우리 정서상 (LGBT는) 용인하기 어렵다. 이슬람이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솜씨좋게 얘기하며 한 발 물러섰다.


조코위의 대통령 취임 전 전임 유도요노 대통령이 구축한 외교기조는 “친구는 수천, 그러나 원수는 제로”라는 것이었다. 조코위는 인도네시아의 주권유지, 인도네시아 국민보호 강화, 경제외교 심화의 3대 외교노선을 강조했다. 이는 국익을 위해 외국과의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코위는 ‘인도네시아:세계 해양의 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양강국의 비젼을 제시했다. 그는 미래에 바다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보고 인도네시아가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서 해양강국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해양의 축 선언에 포함된 다섯 개의 기둥은 인도네시아 해양문화 재건, 해양자원 유지관리, 해양 인프라와 연계성 및 선적산업/해양관광사업 개발, 해양부문에서 협조할 다른 나라들과의 제휴와 해양분쟁의 원천적 해소, 해양 방어력 개발 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외국어선의 불법조업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매일 5천 척 이상의 불법조업 어선의 활동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인도네시아 주권침해일 뿐 아니라 매년 200억불 이상의 손실을 발생시키는 사안이라 말했다.


인도네시아 중국 불법조업어선 폭파장면

(사진: 수시(Susi) 해양부장관의 명령에 의한 중국 불법조업어선 폭파장면)


나투나 섬

(사진: 나투나 섬)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특히 중국의 구단선이 인도네시아의 EEZ을 침범하는 나투나 섬(Natuna Island)에 대해 조코위는 “주권에 있어 양보란 없다”고 천명하고 남중국해의 인도네시아 영해 부분을 “북 나투나해”로 개명했다. 2016년 6월 그는 나투나섬 해상에서 인도네시아 해군 코르벳 군함을 타고 각료회의를 열면서 이 지역의 해양경계 강화를 촉구했다. 그의 행정부는 아세안 회원국들에게 인도-퍼시픽 비젼(인도양-태평양 비젼)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하나의 연결된 지정학적 지역으로 간주하자는 것이었다.

무슬림 사회에게 조코위는 모두 화해하여 대동단결하고 팔레스타인 독립 촉구를 위한 이슬람수뇌회담 조직을 조직하여 무슬림 지도자들을 자카르타로 불러모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코위 집권기간에 외무장관이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으나 이스라엘과 양방향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요구는 거절했다. 조코위는 로힝야족을 탄압하는 미얀마 정권을 비난했고 로힝야 난민들을 위한 구호물품 34톤을 네 대의 공군수송기에 실어 방글라데시로 보냈다.


이상 조코위의 성장과 사업가, 정치가로서 행적을 대략 짚어 보았다. 이제 조코위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조코위 부부와 자녀들

조코위 부부와 자녀들


조코위는 이리아나(Iriana)와 1986년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1987년 10월 1일 태어난 큰 아들 기브란 라까부밍(Gibran Rakabuming)은 시드니와 싱가포르(MDIS)에서 공부했고 현재는 수라카르타에서 급식 및 웨딩플래닝 사업을 하고 있다. 딸 까히양 아유(Kahiyang Ayu)는 1991년 4월 20일생으로 수라카르타의 스블라스마렛(Sebelas Maret) 국립대학에서 푸드테크놀로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둘째 아들 까에상 빵아렙(Kaesang Pangarep)은 1994년 12월 25일생으로 싱가포르의 ACS국제학교에서 고등학교과정을 마치고 온라인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다. 조코위는 2016년과 2018년 각각 기브란과 까히양에게서 손주를 보았다. 기브란의 아들 얀 데테스 수리나렌드라(Jan Ethes Srinarendra)는 2016년 3월 10일 생이고 까히양이 2018년 8월 1일 낳은 딸은 세다 미라 나수띠온(Sedah Mirah Nasution)이다.


jokowi 영화

(사진: 영화 <조코위>)

조코위는 무슬림이지만 겉보기엔 대체로 세속적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3년 6월 개봉된 조코위(Jokowi)라는 제목의 영화는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담았다. 하지만 조코위는 자신의 삶이란 매우 단순한 것이어서 영화로 만들어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며 쑥스러움을 표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조코위가 시끄러운 록음악 팬이며 헤비메탈그룹 메탈리카(Metallica)의 로버트 트루질로(Robert Trujillo)가 서명한 베이스기타를 소장하고 있다가 부패척결위원회 KPK에게 압수당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램오브갓(Lamb of God),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네이팜 데스(Napalm Death)의 팬이기도 하다. 자카르타 주지사 시절인 2013년 11월 2일 솔로에서 열린 록페스티벌 “락인솔로”(Rock in Solo)에 평상복을 입고 참석한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2017년 11월 덴마크 총리 라스 로크 라스무센이 자카르타를 공식방문했을 때 조코위에게 메탈리카 마스터 오브 퍼핏(Metallica Master of Puppets) 비닐박스를 선물로 주었다. 여기엔 그룹 창립멤버이자 드러머인 덴마크인 라스 울리히(Lars Ultich)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세운 투명성 정책에 따라 조코위는 이 음반에 대해 1,100만 루피아(약 800불)를 개인 돈으로 지불하고 국가재산으로 귀속시켜 부패행위로 몰릴 뻔한 상황에서 벗어났다.


메틸레카 기타와 음반

2019년의 대선은 4월 17일로 훌쩍 다가왔다.

총선을 겸한 이번 대선은 지난 해 11월 유세가 시작된 이후 줄곧 분위기가 고조되어 왔다. 강력한 이슬람 지도자, 그러나 너무나 노쇠한 마룹 아민과 짝을 지은 조코 위도도는 2014년에 이어 이번에도 전특전사령관 쁘라보워 수비안토의 만만찮은 도전을 받고 있다. 쁘라보워와 짝을 이룬 그린드라당의 젊은 부통령 후보 산디아가 우노는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의 인기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마치 조코위가 보수, 쁘라보워가 진보일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한다. 이슬람 유권자들은 크게 갈렸다. 마룹 아민의 합류와 함께 인도네시아 이슬람 양대산맥 중 주류인 나둘라틀 울라마(NU)는 조코위 지지를 분명히 했으나 이슬람의 또 다른 축인 무함마디아는 중립을 선언하면서 조코위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시사했으므로 사실상 쁘라보워를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FPI로 대변되는 이슬람 극우 양아치 세력은 쁘라보워 지지를 선언하며 자카르타를 비롯한 주요 승부처에 수많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결국 2019년의 인도네시아 대선은 인구비중 높은 청년층과 이슬람 중도파의 결심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수하르토 시절이 좋았다는 말은 인도네시아 기득권들은 물론 한국인 사업가들 입에서도 흘러나온다. 자국 서민들을 위한 조코위의 정책이 딱히 한국교민들에게 꼭 우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코위의 정책방향은 사회를 보다 평등하고 투명하게 만들려는 것이었고 남들 위에 군림하며 특권을 누리려 하는 이들, 혼탁한 탁류 속에 뭔가 숨기고 싶은 이들에겐 조코위의 치세는 견딜 수 없는 것이겠지만 혜택을 입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오히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사료된다. 물론 지난 4년 남짓한 재임기간 동안 그의 능력과 열심, 그리고 진심과 함께 그가 가진 한계 역시 드러나고 확인되는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누구도 완벽할 순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2019년 4월 17일, 인도네시아인들은 미래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수하르토 시대로 회귀할 것인가? 물론 그렇게 거친 이분법으로 묘사하기엔 더욱 복잡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선택에 귀추가 주목된다. (끝)


2019년 인도네시아 대선


By Beautician님

원문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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